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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크림2021-03-20 04:47

Folie a deux

2020. 12. 12 Gilbert Allen

 

 

 

 

 

*

 

 

 

 

 

볼에 닿는 검은 가죽장갑은 차갑다. 오랜 시간 크리스마스의 차가운 공기에 젖어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개의치 않고 그 검은 장갑에 얼굴을 부볐다. 너무 추운 나머지 눈을 깜빡이면 눈가에서 얼어붙은 얼음 결정이 또르르 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날씨가 꼭 너를 닮았다. 지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저스틴 체이스를 초봄에 비유하곤 했다.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따뜻하고 다정히 구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제대로 꽃봉오리를 터뜨린 것이 하나 없다는 점에서 제법 들어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겨울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에는 추위보다는 새파란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지는 그런 겨울 말이다.

손가락을 세워 자기는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듯 자의라곤 하나 들어가지 않은 채 제 손아귀 안에 얌전히 놓여있는 네 손을 매만졌다. 흉터투성이인 네 손을 덮은 반장갑 아래의 따뜻한 살결이 닿는다. 손끝에 걸리는 수많은 요철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애써 내색은 않았다.

차가운 장갑 아래의 네 손은 따뜻하다. 네 손 위에 사뿐히 내려앉을 눈송이는 분명 네가 눈치채기도 전에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니 얼어붙은 것이 모두 녹아내리고 겨우내 땅 아래서 웅크리고 있던 씨앗들이 고개를 들어 푸른 잎을 세상에 내보일 준비를 시작할 1월 31일의 겨울은 너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나는 계속 너를 바라보았던 걸지도 몰라, 저스틴. 이런 이야기 또한 지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기에 다시금 다 갈라진 목구멍 너머로 문장을 삼킨다.

왜냐면 저는 가을이었으니. 시야를 채운 모든 것의 색이 바래고 익은 것, 활짝 폈던 것, 비쩍 곯은 것, 꺾였던 것,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제 고개를 숙이고 말라비틀어져 떨어지는 늦가을 말이다. 앞으로 제 앞에 놓인 길은 매서운 겨울밖에 없을 10월 29일의 가을.

크리스마스에 젖어 차가워진 것은 네 가죽장갑뿐만이 아니었기에 너를 붙잡느라 한참을 바깥에 내어두었던 손가락이 네 손목 아래의 살갗에 닿자 네 피부가 가볍게 떨린다. 언제나 저는 추위를 쥐고 있었고, 너는 온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은 너고, 가을은 나다.

그렇기에 너는 자신을 나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이미 가을인 적이 있던 겨울. 나는 너에게 과거의 저스틴 체이스였던 길버트 앨런이다. 내가 눈치 못 챌 줄 알았나봐. 나는 눈치가 빠르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기어코 작게 자조하고 만다.

너는 그날 날 그 짙고 얕은 어둠에서 꺼내었다. 나의 17년은 너무나도 어둡고 짙어서 아주 희미한 달빛만이 간신히 새어 들어올 수 있었으며, 저스틴 체이스가 에버릿 스트릿의 가장 끝에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찢어지고 흩어질 정도로 얕았다.

왜냐면 과거의 나는 너와 닮았으니까.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개미지옥 같은 악몽에 빠져 미래를 바라볼 생각도 못하던 길버트 앨런과 당장 발밑이, 내일이 무너져 내려가는 와중에도 앞만을 바라보고 달려야 했던 저스틴 체이스가 말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게 시작된 것이다.

10년 전, 회색빛 에버릿 스트릿에서 벗어나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호그스미드 거리를 걷는 저의 옆에 늘 함께하던 너는 제가 걷는 거리를 비추는 나의 태양이었다. 그리고 혹여나 악몽에 빠질까 잠든 제 곁을 눈뜬 채로 지켰을 너에게 나는 밤을 비추는 달이었으리라.

사랑에 이유가 있나? 너의 말대로 사랑은 아주 사소한 계기 하나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너는 그저 그 자리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빛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그 자리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가라앉았을 뿐이었고.

하지만 달빛 아래에서 보는 밤바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아침 햇빛 아래에서 눈을 떴을 때 옆에 네가 있다는 사실은 제게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다. 누군가는 단순히 일상이라 부를지 모르는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그 하루가 제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기에 저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사랑이란 고작 그거다. 그런데도 너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왜 그렇게 나에게 도망쳤는지. 너와 저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두꺼운 벽 너머로 목이 터져라 외쳐대도 네게 닿지를 않는다. 저스틴, 대체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거냐고. 그게 무엇이기에 9년간 나를 외면하게 만든 거냐고.

나는 잃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면 애초에 가진 것이 없이 태어나 잃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저는 미련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쥐고 나서도 그것을 잃을 거라는 가정 자체를 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저를 묶어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저스틴 체이스가 그려낸 자유다. 기어코 길버트 앨런은 27년의 삶 동안 저스틴 체이스로 완성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나를 저스틴 체이스가 저스틴 ‘체이스’로 완성되어가는 도중 고른 가장 최악의 선택이라 부른다. 담담한 목소리, 슬픔에 잠긴 눈동자로 내게 이별을 고한 것은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너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을 터이다. 나는 과거의 저스틴 체이스였기에 누구보다 너를 잘 알 수밖에 없다. 너는 과거에 매여 사랑을 의심한다. 너는 사랑에 매여 시간을 의심한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잃는 것이 두려운 거야, 그렇지?

나는 과거의 너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러 온 저승사자다.

하지만 저스틴, 인생은 최악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거야. 그리고 사랑은 그 최악의 선택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이고. 그건 네가 나한테 가르쳐준 거잖아, 저스틴 체이스. 그게 내가 비록 조금 비틀거릴지언정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 이유라고.

그리고 나는 앞으로의 너를 안내할 길잡이고.

수많은 감정이 네 눈동자에 떠오르다 지워지길 반복한다. 너는 나를 갈구하다가도 불확실에 고개를 젓는다. 애정 어린 눈길로 저를 훑다가도 두려움에 데여 화들짝 눈을 뗀다. 채 1년도 버티지 못했던 찰나가 저의 영원을 의심한다.

1년, 9년, 25년, 275년, 316년, 2765년……. 필멸자는 상상도 못할 그 긴 세월 동안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뜨고, 그 자리에서 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감히 영원이라 부를 수 있는 약속일 것이다. 태양과 너, 달과 나.

우리를 감싼 새벽이 밀려간다. 이제 곧 저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올라올 것이다. 느릿하게 제 볼을 감싸게끔 했던 네 손을 떼어낸다. 제 얼굴을 네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도 소리를 질러대 이미 갈라져 제대로 나오긴 할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제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시선을 올려 너의 눈을 마주한다. 이것은 결코 너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나의 결의다.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네게 건넬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야 이건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변하지 않을 명제니까.

길버트 앨런은 저스틴 체이스를 사랑한다. 태양이 지면 달이 뜬다. 그리고 달이 지면―

오늘의 달이 떴어, 저스틴. 그러니까 내일의 태양을 보러 가자. 이 시간이 끝날 때까지.

“당연한 소리를 하네, 저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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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무척이나 쉽지. 이미 네가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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